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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Book review) , 성공, 부자 등

이봐, 해 보기나 했어?

by 머니로즈 2023.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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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해 보기나 했어?

안녕하세요? 머니로즈입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어요. 겨울이 많이 깊어지고 있어요.

올해도 어느덧 일주일도 안 남은 상태인데요. 

항상 이맘때면 '내가 올해 뭘 했지?' 하며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고는 하지요.

바쁘게 달려온 것 같은데, 이루어 낸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은 이 허탈함은

왜 해마다 되풀이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

 

'작심삼일' 이라는 말도 생각이 나고.

그러면 삼일 뒤에 다시 결심하면 되지 않느냐고, 또 결심하고 또또..

 

생각해 보니,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우리시대의 존경할 만한 인물이 많네요.

그 중에 한 분,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전쟁 중, 아무것도 없고 주위가 폐허로 변한 속에서 지금의 걸출한 현대 그룹을 탄생시켰잖아요.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자동차 산업, 경부고속도로 건설, 특히 조선사를 창립할 때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영국에서 차관을 신청할 때, 우리 같은 작은나라, 전쟁을 겪고 폐허가 된 곳에서,

배를 만들 수 있다고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을 때

당당히  500원 동전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고,

우리는 1500년대에 벌써 이런 훌륭한 배를 만든 저력이 있었다는 것을 어필했다고 하지요.

 

그 당당함, 그 패기 오늘을 사는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정신입니다.

작은 일에도 '못 해' '그걸 어떻게 해' '그건 불가능 해'

우리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들입니다.

 

"이봐. 해 보기나 했어?"

 

그럼 정주영 회장님의 조선소 건설당시의(500원 동전에 얽힌) 일화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1970년 3월, 조선 사업부를 설치하고 이어서 부지 선정 등 기초작업을 본격화했다.

그때부터 도로를 비롯한 간접자본 분야에서 마찰이 생겼다. 예산 미달을 이유로 지연되는 도로를 

우리가 깔기 시작하자 정부는 사전 공사는 위법이라는 경고를 내렸고, 장차 중전기와 엔진 부분까지

 

그러는 중에 직원들은 송사에 얽혀들기도 했고 사업 타당성에 회의를 품은 도시계획위원회는 현대조선 사업본부를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허황된 꿈이 아니다. 우리는 경부고속도로를 닦은 막강한 건설군단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단양에는 현대시멘트가 있다. 입지조건 또한 완벽하다. 차관 역시 배를 팔 수 있게 되는 즉시 해결된다."

 

수개월에 걸친 도시계획위원회와의 실랑이는 만만치 않았고 세평도 냉정했다.

그러나 나는 신념이 있었고 신념이 있는 한 멈출 수 없었다.

71년 9월, 영국의 애플도어사 및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와 기술협조 계약을 체결하고

그때까지 별무 신통으로 

남아 있던 차관 도입이라는 난제 중의 난제와 승부를 내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 어떻게 버클레이를 추직일 수 없습니까?"

앞서 정희영 상무가 교섭했으나 신통한 반응이 없었던 은행이었다.

" 아직 선주도 나타나질 않고 또 한국의 상환 능력과 잠재력 자체에 의문이 많아서 곤란하군요."

 

롱바톰 회장의 대답에 맥이 쭉 빠졌다.

 그런데 그때 바지 주머니 안에 있는 5백 원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나는 5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펴 보였다.

 

"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한 때 기선단으로 오대양을 누비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해운국의 후예 롱바톰 회장이 지폐위에

그려진 거북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우리는 1천 5백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던 실적과 두뇌가 있소. 영국 조선 역사는 1천 8백년대부터라고 알고있습니다. 우리가 3백 년이나 앞서 있었소.

다만 쇄국 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졌고 그동안 아이디어가 녹슬었던 것이

불행한 일이지만 그러나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내말에 롱바톰 회장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도움으로 다시 버클레이 은행과 차관 도입 협의가 시작되었다.

버클레이 은행은 우선 관계자들을 우리나라에 파견해서 우리가 건설한 화력발전소, 비료공장,

시멘트 공장들을 조사시켰다.

 

 조사결과, 현대건설의 모든 인원과 기술자의 재교육과 훈련을 전제한다면, 우리가 배를 만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다시 한 차례 버클레이 은행의 심사가 있은 후, 그쪽 책임자들과 우리 기술진의 대화 요청 연락이 왔다.

세계 금융센터라는 영국 런던 은행계는, 짙은 보수성과 고집스러운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곳이다.

 

신규 차관 신청서를 받아 종횡무진의 정보 분석과 현지 답사. 이사회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이른바 일체의 동양식ㅡ막후 접촉이나 정치적 압력을 금기시하고 배제했다.

 

버클레이 은행 부총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내게 물었다.

"당신의 전공이 뭡니까?"

'당신이 지금 은행에서 돈 빌려다 조선소 만들아 배 팔아서 갚겠다는데 전공이 경영학이냐 

이공학이냐'응 질문이었다.

소학교만 다녔지만 그동안의 사업을 통해서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고 대답해야

우문 우답밖에 안 될 것이다.

나는 되물었다.

"부총재, 당신은 내 사업계획서를 보았소?"

" 그 사업계획서가 내 전공이오, 사실은 내가 어제 옥스포드대학에 그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가서 학위를 

달라니까 한 번 들쳐보고는 두말 없이 학위를 줘서 나는 어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소.

그 사업계획서는 그러니까 내 학위 논문이오."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옥스퍼드 유머'는 일시에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옥스퍼드대학 경제학 학위를 가진 사람도 이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거요. 옥스퍼드대학에는 

석학들이 많군요.

다시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나는 이미 면접시험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 당신의 전공은 유머 같소,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이 사업계획서를 수출보증기구로 

일단 보내겠소. 행운을 빌겠소. 정사장."

나는 두 개의 바늘구멍 가운데 겨우 한 개를 빠져나왔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중에서 

                                                                -  중략  -

 

이렇듯 정주영회장님에게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확신과 실행력' 이었습니다.

 

우리도 정주영회장님을 본받아 멈추지 않는 실행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 봅시다.

 

이봐, 해 보기나 했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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